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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13. 진로 고민일기/기록 2014. 11. 13. 11:56
1. 고민하고 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잘했고, 그래서 커서 화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경험했던 입시미술이 진저리나게 싫었음에도 정확하고 공간감있는 그림을 그려내는데 기계적으로 학습해왔다. 동시에 대학에 가면 꼭 내가 하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야 말겠다,라고 생각했다. 뜻대로 대학 수업은 정말 재밌었고 좋은 작품이 나올 때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독일에서 오신 교수님의 얘기를 듣다가 '하루 빨리 나도 독일에 가야지'라고 생각해서 독일 유학을 결심하고, 휴학을 내서 유학자금을 모으게 된 게 지금이다.
근데 요새는 잘 모르겠다.
예전엔 그냥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았다. 내 생각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작업에 녹아내서 표현하는 게 자신 있었고, 재미있었다. 그런데 지금 다니고있는 대학을 자퇴하고 독일에 가서 회화를 배운다는 건 그림을 내 평생 직업으로 삼는다는 뜻인데, 내가 그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있는건지 잘 모르겠다는 거다. 그림에 미쳐서 어디서든지 드로잉하고 크로키를 그리는 사람들이 있다. 난 그정도는 못된다. 카페에 혼자 앉아있으면 그림을 그리기보다 게임을 더 많이한다. 쉴새없이 그림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그림을 정말 좋아하는건지, 정말 작가가 하고싶은건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독일을 가는게 맞는건지도 잘 모르겠다.
2. 그럼 너는 무얼 좋아하느냐?
묻는다면 나는 역시 생각하고 고민하고 그렇게 도출한 것을 표현하는 게 좋다. 여성에 대해, 남성에 대해 생각하고 성에 대해 생각하고 교육에 대해, 종교에 대해, 국가에 대해 생각하고 공부하고 고민하고 결국 '잘' 표현해내는 것이 좋다. 잘 표현해낸 것도 좋아한다. 그래서 잘 표현된 영화나 애니·만화나 글이 좋다. 그런 걸 접하다보면 '아 나도 잘할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 든다.
3. 나는 결국 작업을 해야하는 것 아닌가.
영화나 애니를 제작하고 싶지는 않다. 보고 비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커플링 연성 만화면 몰라도..) 근데 글은 좀 욕심이 난다. 팔짝 뛰겠는건 그림은 욕심이 안 난다는 거다.
4. 왜?
우선은 '내가 낄 틈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정말 갖가지 방법으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많다. 신박하고 놀랍고 재미있고 예쁜 작품들이 넘쳐나는데 내가 거기서 경쟁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하는 모든 작업들이 다 식상하고 구시대적인 것일까봐 겁나기도 한다. 생리대에 붉은 실로 작업하던 사람이 이미 그런식의 작업이 몇십년 전에 있었다는 걸 알았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지 않나. 나는 나름 신박하다고 만든 작업이 '별로 신박하지 않아'라는 평가를 받게 될때가 두렵다. 유화 작업이나 비단 작업 같은 평면 작업을 넘어서 설치작업도 무엇을 생각하든 '이미 존재하는 것들'과 중복될 때가 많고 그들 사이에서 내가 빛나지 못한다는 걸 깨달을 때 작가로써 무척 초라해질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