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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두나, 김새론. 매력과 실력을 갖춘 두 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한다는 영화 <도희야>는 그 캐스팅만으로도 내 눈길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우중충한 시골 배경에서 경찰 유니폼을 입은 성인 여성과 어린 여학생 사이에서 일어나는 위험하고 긴밀한 이야기"처럼 묘사하는 예고편도 나의 덕심을 쿡쿡 자극했다. 그런데 예고편에서 티끌도 내비치지 않은 자극적인 코드가 멀티플렉스에서 버젓이 상영하는 영화의 전면에 심어놓은 것을 '목격'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도희야>는 내게 꽤 충격적이었다.
- 스포일러 주의 -
한 외딴 바닷가 마을에 영남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새로운 경찰서 소장으로 내려오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배두나가 특유의 고독하고 건조한 눈동자를 하고서 챙겨온 물병 한 박스를 트렁크에서 싣어내리는 장면에서 '여기도 물 팔아요'하고 다소 분에 찬 주민들을 시큰둥하게 무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물병 안에 든 것은 물이 아닌 소주. 퇴근하면 물컵에 소주를 콸콸 따라 아무렇지 않게 마셔대는 영남에게서 '사연 있는 여자'의 냄새가 폴폴 풍긴다. 그러던 중 학교 친구들에게 삥을 뜯기고, 폭군같은 할머니와 아버지 용하에게 맞는 어린 도희를 마주하면서 영남은 도희를 보호해주기 시작한다. 할머니가 사고로 죽고 용하는 영남의 경고를 무시한 채 도희를 심하게 폭행하자 영남은 도희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고 방학 동안 보살펴주기로 한다. 즐거운 몇 주가 지나고 영남에게 예쁘장한 한 여자가 나타나 도희와 영남 사이에 형성된 유대관계에 큰 금이 가게된다. 여자는 영남의 '전 여자친구'였고 (이 동성애 코드가 멀티플렉스 상영관에서 그것도 한국영화로 아무렇지 않게 진행되는 점에서 어마무시하게 경악함) 영남이 이 마을로 온 것도 이전 서에서 '레즈비언 경찰관'으로써 저지른 잘못 때문임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도희는 그런 영남에게 더 집착하기 시작하고, 불법체류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폭력을 행사해 영남에 의해 구속되며 그녀에게 앙심을 품은 용하는 '레즈비언 경찰 소장 영남'이 도희를 성폭행했다며 그녀를 맞구속시키는데 이른다. 그리고 도희는 구속된 영남이 풀려날 유일한 열쇠는 자기 자신임을 깨닫고 아버지 용하가 자신을 성폭행하려한 것처럼 꾸민다. (경악2) 나뭇가지처럼 야위고 연약한 마디마디의 손가락으로 술 취한 용하의 바지 버클을 풀어 그 안에 손을 밀어넣는 도희의 표정은 티끌의 수치심도 없었다. 오직 영남과 함께 있기 위한 마지막 필사의 몸부림이었던 것 같다. 용하는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끌려가 구속되고 영남은 도희에게 돌아와 묻는다.
"나랑, 갈래?"
영화의 칭찬은 자자하니 나는 아쉬운 점을 열거해보고자 한다. (사실 본지가 몇 주 되서 몇 번이고 곱씹었던 아쉬운 점 밖에 기억이 안 남...)
1. 영남이 답답해
영남은 레즈비언이다. (최소한 성소수자다.) 동시에 그녀는 영리하고 단호한 여성이고 경찰 소장이라는 비교적 높은 직책을 맡아 나름의 권력을 가진 캐릭터다. 그런 영남이 도희를 향한 아동성폭행이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조사를 받는데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고 굴욕적인 비난 앞에 고개 숙이고 있는 장면에서 정말 답답했고 진정 영남에게 어울리는 행동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캐릭터 설정 상의 영남이라면 용하에게 수십번 죄의 책임을 물었던 것처럼 당당하고 떳떳하게 스스로의 누명을 해명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영남은 전적 때문에 서울에서 내려오긴 했지만, 당장 돌 맞아 죽어도 괜찮은 자포자기 상태도 아니었고 도희를 많이 아끼긴했어도 그녀에게 어떤 욕구나 사랑의 감정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일부의 덕후들은 그렇지 않아 8ㅁ8! 하고 외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화 속에선 그렇게 묘사했다.) 그렇다면 조용히 물병에 소주나 담아 마시며 소박하고 고독한 삶을 살고 싶었던 영남이 왜 그런 물증도 심증도 부족한 누명에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하고 애매모호한 대답만 하며 의심의 증폭을 야기했을까? 난 이게 영남 캐릭터의 헛점이고 이 헛점을 빌미로 영남이 철창에 구속되어 도희에게 결정적인 '악을 실천할 기회'를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2. 왜 꼭 그녀는 레즈비언이어야 했을까?
영화관을 나온 뒤 내내 신경쓰였던 동성애 코드에 대한 부각의 찝찝함이 이 지점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확실히 한다. 나는 계속 '이 영화에 레즈비언 코드가 정말 필요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영화가 정말로 말하고 싶은 맥락에 시시껄렁한 땅콩 안주로 곁들여져 있는 느낌이었다. 영화에서 영남은 전 경찰서에서 그녀의 성 정체성에 관한 어떤 사건 때문에 징계를 받고 이 섬마을에 내려온 것이라 암시되지만 그게 대체 얼마만큼의 당위를 갖길래 똑똑하고 영리한 영남이 제대로 항변도 못하고 구속될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었는지 관객으로써는 알길이 없다.
"사실 그건 다 아빠(용하)가 시킨 거였어요" "소장님은 그저 절 보호해주고 사랑해준 것 뿐이에요, 나를 성폭행하려 한 건 아빠에요." 라며 도희는 자신의 구원자이자 성애를 느끼는 영남을 위해 거짓 진술, 성폭행 당한 척하는 쇼를 시작한다. 결국 성공적으로 영남을 구출해내며 도희는 '오직 영남을 위해' 악을 실천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하나 더 설명해야하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영남이 풀려나와 도희와 재회했을 때 그녀는 묻는다. "할머니를 죽인 것도...?" "..." 도희가 부인하지 않고 눈물만 뚝뚝뚝 흘리는 이 장면은 도희가 영남에게 깊게 애착을 갖기 전에, 그러니까 스스로를 위해 온전한 악에 받쳐서 할머니를 죽음에 내몰았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설명해준다. 여기서 난 차라리 영남과 도희의 관계가, 애매하고 어설픈 레즈비언 코드로써가 아니라(부차적 기능을 사용해서 레즈비언 코드로 해석될지의 여부는 물론 남겨두더라도) 이러한 그녀들 속에 내제된 악, 환경이 주어진다면 충분한 살인의 가능성으로 엮여나갔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사실 영남이 이 섬마을로 쫓겨나듯 내려오게 된 것도 레즈비언으로써의 문제가 아니라 성폭행했던 아버지를 거의 죽였다거나, 죽음을 방치했다거나, 그 과정에서 사실은 진범인 어린 여동생이 소년원에 갔다거나해서, 할머니를 죽이고 아버지를 구속시킨 도희와 비슷한 경험 혹은 동질감 따위 때문, 따라서 그녀와 엮인 건 필연이 아니었을까? 하는 듯한 반전과 같은 결말이 훨씬 설득력있지 않냐는 것이다.
3. 도희의 악
나는 영화를 보면서 내내 <케빈에 대하여>의 케빈을 도희에게서 떠올렸다. 수많은 차이점이 둘 사이에 존재하지만 영화가 묘사하는 두 '아이'는 분명 '순수한 의도'로 '악을 행하는 존재'다. 다만 케빈은 영화의 서사 자체가 케빈이 가진 태생적인 악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이라면 도희의 악은 영남과 얽힌 레즈비언 코드에 가려져 그 발생 원인도, 지점도, 과정도 불투명하고 애매해 어물쩍 넘어가버린다. 나는 영화 <케빈에 대하여>처럼, 하지만 캐릭터 케빈과는 달리 도희만의 악을 좀 더 자세히 파헤쳐주기를 바랬다. (막막 자해한다든가 방안을 어지럽힌다든가 영남에게 찰싹 붙어잔다든가하는 것들 말이다... 그런 게 어케 생겨난건지, 어디서부터 증폭되기 시작하는 건지 좀 파헤쳐줬었으면!) 그럼 분명 훨씬 씹덕스러운 요소를 많이 보여줬을거라 생각함... 그리고 나같은 덕후들이 몰려와 마구 핥아댔겠지... ^ㅅ^ 거기에 덧붙여 영남에게도 비슷한 요소를 부여해서 도희-영남 관계를 S극 N극 마냥 서로 끌어당길 수밖에 없는 관계로 묘사하고 그걸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면 좋았을 걸! 토 오못따.
+ 도희에게 '괴물'같다고 한 어리버리한 형사. 대체 도희의 어떤 면을 봤길래 괴물같다고 하는건지 설명이 부족함.
+ 작은 캐릭터 설정들-어리버리한 형사가 영남 전화받고 뛰어나왔을 때 루피센쵸가 그려진 티셔츠 입고 있던거 깨알 귀엽ㅋㅋ, 잔망잔망한 도희의 애교, 춤-은 참 꼼꼼해서 감초처럼 재밌었다.
+ 문 두드리는 장면이 몇 십분마다 반복되어서 문만 잠깐 보여도 이번엔 대체 누구야ㅡㅡ 싶었음
끝. 그래도 난 이렇게 작은 무대에서 적은 인물들로 최대의 전개를 뽑아낸 <도희야>가 매우매우 재밌었음. 멀티플렉스에서 동성애 코드 영화가 버젓이 상영돼서 경악했다는 건 '이럼 안되지!'가 아니라, 헐 설마 레즈비언 역이겠어, 헐, 헐... 헐? 전혀 받아들여질 줄 몰랐는데!? 이런 차원의 경악... "그러니까 이게 우리나라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단 말이야???" 근데 하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입장도 아니었던데다 청불이니 뭐. 다음엔 좀 더 그럴듯한 것에서 경악해야겠다. 레즈비언 로코물이나 트랜스젠더 로코물같은 걸로.
+ 십덕십덕... 배두나 언니 옙허요 흑흑
나시입고 해변가에서 운동할 때 숨멎 ㅇ(-(
얇게 비치는 경찰복 단추 하나하나 끌를 때 숨멎 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