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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7. 28.일기/기록 2014. 7. 28. 00:58
1. 17일에 회사 뒤에 있는 주차장에서 상태가 심각해보이는 아깽이 한 마리를 발견하고 바로 구조해 동물병원으로 데려갔다. 눈에는 눈곱이 잔뜩 껴 있어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잔뜩 야윈 몸통에 다리의 살가죽은 다 벗겨져 앙상한 뼈가 다 보였다. 참치캔으로 유혹한 후 들어올려서 병원으로 옮기는데 혼신의 힘을 다해 할퀴고 몸부림 쳐도 자체적으로 힘이 너무 없어서 안쓰럽더라.
3일간 입원시킨 후 지금까지 집에서 잘 돌보고 있는데 어제 엄마와 마찰이 심했다. 원래 고양이를 좋아하는 나에게 누누히 고양이는 절대 안된다고, 독립하면 키우라고 경고 비슷한 당부를 했었지만 나는 다 죽어가는 어린 생명을 구조해 잠시 집에 있게하는 것조차 이렇게 끔찍히 싫어할 줄은 몰랐다. 아니 나는 심지어 잘 하면 키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었다. 엄마의 불만사항은 내가 없는 사이에 본인이 계속 우주(두 달된 아깽이)의 소변으로 뭉쳐진 모래덩어리와 응가를 치워야하는 것에 대한 불쾌함, 냄새, 넥카라를 자꾸 긁어서 내는 소리에 대한 짜증이었다. 그것을 고려하지 못하고 같이 사는 공간에 말 없이 데려온 것은 내가 혼날만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우주는 내가 데려오지 않았으면 죽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 무엇보다 생명의 존엄을 중시하는 나의 가치관이 우주를 외면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나는 최소한 이러한 나의 신념만큼은 엄마가 인정해줄 줄 알았는데, 개뿔 다시 유기하자는 말이나 하다니, 나는 그런 그녀가 너무나 악마처럼 보였다. 어떻게 그런 말이 가능한가. 나도 내 생활이란 것이 있는데 내가 없을 때 응가 하나 치워주는게 그렇게 힘들단 말인가? 병원비 손 벌린 적도 없고 통원치료 받으러 다닌 것도 사료와 모래를 사다 놓은 것도 주기적으로 보살피고 집안을 치워놓은 것도 나인데 내가 최대한 해 안 가게 애썼는데 그것 마저도 뭐라한다면 나의 구조행동 자체를 비난하는 것 아닌가? 그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모욕적인 것을 넘어 이해가 안 가는 비난이다.
게다가 넥카라를 자꾸 긁는게 신경쓰이니 벗겨두라는 간곡한 부탁에 넘어가 우주의 넥카라를 잠시 풀어준 사이에 우주가 다 아문 상처를 죄다 긁고 떼어놔서 다시 살 가죽이 보이고, 예쁘게 올라오던 귀 근처의 털들도 다시 원래 피부를 드러내게 됐다. 존나 속상하고 짜증나고 원망스러워서 좀 째려봤더니 자기가 저렇게 될줄 알았냐며 도리어 나한테 성내는데 이런 사람이 날 낳고 키웠다는 게 참 불가사의하더라. 차라리 그녀의 이기적인 가치관을 그대로 전수받아 자랐다면 이런 마찰도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주는 8월이 오기 전에 좋은 집사에게 입양시킬 생각이지만 집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유기동물보호소에 연락해보고 그 마저도 여의치 않는다면 내가 좋은 집사에게 갈 때까지 보살필 예정이다. 절대로 우주를 다시 유기할 수는 없다. 이건 당당히 당부하고 내가 책임지겠다고 해야겠다. 그리고 심한 단어를 쓴 것에 대한 사과하고 그 뜻으로 뭔가 소정의 물건을 드려야겠다.
2. 여하튼 나는 우리 가족과 전혀 상극이다. 엄마와도 그렇지만 아빠와도 안 맞고 동생과도 안 맞는다. 우리 가족은 근본적으로 소통에 문제가 있다. 그걸 지금에서 긍정적으로 해결해보려는 노력은 더더욱 안 맞는다. 그냥 각자 뿔뿔히 흩어져서 사는 게 답인 것 같다.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지, 그 끔찍한 이기심에 치가 떨릴 지경이고 아빠는 그가 오랫동안 갖고 계신 고질적 폭력성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한 내가 용서하지 못할 것 같고, 동생은 사춘기라 그런건지 그걸 스스로 내면화한건지 짜증과 감정중심적, 자기중심적 태도를 엄마와 나에게 여과없이 표출해서 정 떨어진다. 으으 모르겠다 이 사람들. 내가 그렇게 뛰어나거나 천사라거나 하는 자부심은 없어도 최소한 이들처럼 못났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대체 어떻게 성장한 건지 스스로가 대견하다. 오랫동안 느낀 거지만 나는 혼자 잘 큰 것 같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개인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다. 개인의 잘못은 분명히 사회가 잘못되어있기 때문에 일어나고 최소한 정치인이나 활동가라면 그러한 고민은 기본값으로 깔고 가야한다.'라는 나의 큰 지론과 충돌하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내가 잘 큰 건 주위의 영향이 없지 않다-라고 말해야하는데 배울 점이 한 가지도 없는 우리 가족들 사이에서 그 영향력을 찾기란 정말 피로한 일이라는 거다.
누가 읽으면 꼭 이 시대의 희대의 썅불효녀처럼 보이겠지만 나름대로 엄마와 동생을 사랑하고는 있다. (아빠는 놉) 그들과 공유해온 내 성장기 삶을 나에게서 생살을 떼어내듯 분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나를 구성하는가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극소하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3. 가고 싶었던 여성주의 세미나를 오늘 다녀왔다. 흥미롭게 느낀 점이 굉장히 많고 고민이 깊어지기도 하고 내 작업으로는 어떻게 써먹을 것인가하는 활성제 역할을 톡톡히 한 것 같다. 사실 1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의 휴학을 반 이상 지나오면서 작업도 없고 공부도 없는 그야말로 썩은 고인물 같은 요즘의 나 자신을 회의적으로 성찰하면서 참담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는데 여성주의 세미나는 그런 나를 나름 위로해준 듯하다. 내게 앞으로의 방향성 내지는 관심사를 제공해줬달까.
3-1. 내가 참여한 이번 주의 세미나의 주제는 '반성폭력'이었는데 앞서 있었던 주제들에 비해 논쟁이 이루어질만한 요소가 덜해 (페미니즘 내에서 대부분이 비슷비슷한 입장을 내걸고 있기 때문에) 반성폭력 주제가 반, 다음 세미나 주제인 포르노에 대한 인트로가 반이었던 것 같다. 페미니즘 내에서, 그리고 일부는 외부에서도 공유하고 있는 성폭력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은 그야말로 '반성폭력'이다. '성폭력의 피해자 여성에게 원인과 책임을 전가하면 안된다'는 문장 또한 큰 거리낌 없이 (학생)사회에서 수용되고 생산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법체계에서 존재하는 성폭력의 젠더 폭력성과 그 자체로 재생산하는 '남근중심주의'적 남성 성욕의 본질화, 동시에 다시금 성폭력을 여성(피해자)의 책임으로 환원할 수 밖에 없는 문제를 지적한 것은 나에게 신선했으며 깊이 동의했다.
개별 성폭력 판결에서 발기와 욕망(생각)은 '성욕이 이는 것'으로서 제어하지 못하면 삽입을 통한 성폭력을 일으킨다고 지속적으로 설명되어왔다. '병리' 상태의 남성 가해자는 그 자체로 '위험'하기 때문에 어떤 장소에 있더라도 피해자가 될만한 여성이 있다면 범죄는 예견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담화는 성폭력을 설명하는 것에 있어 가해자들을 중심에 놓고 일상적 공간, 즉 아동과 여성이 존재하는 사회를 '위험'이 내제된 공간으로 상정한다. 사법담론은 이 일상의 공간 외부에서 '보는' 자의 위치에서 생산된다.
- 한국 성폭력 가해자의 병리적 범죄자성 구축에 관한 연구 : 이주해, 2014
논문에서 발췌하고 있는 여러 판결문에 따르면 일관적으로 법관은 여성을 '보면' 성욕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이는 피해자가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피해자 유발론과 일직선상에 있는 것이고 남성의 욕망이 본질적인 것이라는 전제를 담고 있는 강간 통념 또한 긍정하게 된다. 그렇게 성욕의 문제와 성충동을 끊임없이 말하고 처벌함으로써 은폐하려는 것은 가해자 남성들이 성적 욕망의 충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배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여성을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본래 피해자들에게 "남자는 쉽게 발기하곤 하니 어쩔 수 없다. 네가 조심해야한다."는 식의 너무나 일상적인 당부들을 접하며 그렇다면 남성은 스스로를 본래 이성적 판단이 붕괴될 정도로 성욕을 제어할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표현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었다. 더 나아가 그 본질적 존재로 규정이 (도구로 사용되는 여성을)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은폐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는 말이 신선했다. 또한 그런 남성 가해자들을 그들 개인의 병리적 문제로 치부하며 계속 성폭력을 재생산하지 말고, 일반 남성들에게도 포함되는 사회적 문제로 환원해야한다는 주장도 공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