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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기로 했다.
    일기/사유 2018. 1. 29. 03:15




    아무도 궁금하지 않을 이야기겠지만


    나 어렸을 땐 말이야. 

    나이가 들면 그렇게 되나보다.  나 스스로 참 꺼렸던 말인데, 이제는 자연스레 꺼내게 된다. 난 나 스스로를 또래보다 예민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좋게 말하자면, '인권감수성'이 높은 아이. 혼자 집회도 쫄래쫄래 가고, 길거리에서 서명 운동을 하면 꼭 하고, 누구와 키보드 워리어짓을 하게 되면 한 쪽이 끝장날 때까지 했다. 그 시기 나를 지배했던 생각은 '올바른 사람이 되고 싶다'였다. 언제 한 번 아빠가 내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물었을 때 고민 끝에 한 대답이었다. 


    나는 나와 이야기가 통하는 또래 친구들에게 내가 믿고 옳다고 생각하는 사상에 대해 알려주기를 좋아했다. 그렇게 하면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 믿었고, 친구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해주기를, 또 나를 멋진 사람으로 생각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나에게 '넌 참 생각이 깊어', '너에게 배우는 게 많은 것 같아'라는 말을 해주면 정말 보람차고 기뻤던 기억이 난다. 이 무렵에 했던 페미니스트가 되겠다는 결심도 이러한 욕망과 관련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당시에 나는 여성을 평가하고 규정하며 김치녀인지 개념녀인지를 나누는 이분법적 프레임이 성평등을 저해시킨다고 여겼고,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어 내 다양한 생각들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여성인권을 주장하는 단체에서 활동을 하고 여성비하에 대한 비판을 주제로 하는 작품을 만들기도 하고 세미나에 나가보기도 하며 내 생각을 넓히는 작업을 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내가 페미니스트를 하겠다고 나섰을 땐 남성 전체를 범죄자 취급하는 사상을 믿지는 않았다. '모든 여성은 옳아'라는 터무니 없는 망상에 빠져있긴 했지만, '모든 남성은 개새끼야'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메르스 갤러리에서 메갈리아가 만들어지고 한창 페이스북에서도 메갈리아1,2 같은 게 존재할 때는 나도 그들을 응원했었다. 여성들이 여성 혐오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에 문제제기를 하고, 사유없이 내던지는 단어들이 사실 성차별에 기반한다는 것들을 짚어나가는 과정은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메르스 갤러리의 시초는 남연갤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과격한 분위기가 있고 그 때부터 남성혐오가 존재하긴 했지만 지금의 넷페미 동향보다는 고민도 있고 상식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현재 내가 생각하는 넷페미의 형태는 :

    1. (자칭)래디컬 페미니스트 워마드, 트위터를 기반으로 하고 남성은 모두 죽어야 한다, 성적대상화 되어야 한다, 여성이 지금까지 당한만큼 그대로 갚아주어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 이들. 미러링에 심취해있고 일종의 놀이처럼 즐긴다. 본인을 페미여전사라고 칭하길 좋아하고 '냄져' 패는 게 요즘 재미라고 하는 등 폭력적인 허세가 있다. 어떤 것들의 권리보다도 여성의 권리가 최우선이고 현재 제일 열악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리버럴 페미니스트를 '쓰까페미'(다른 인권도 챙기는 것을 비하하기 위함)라 칭한다. 특히 게이, 트랜스젠더를 혐오하며 그 혐오하는 행위를 매우 즐거워한다. 이들 사이에서 '우리가 하는 것도 페미니즘이다/페미니즘이 아니고 여성우월주의, 남혐이다'가 나뉜다.

    2. (자칭)리버럴 페미니스트 트위터 외에 굳이 어디를 기반하고 있다고 특정하기 어려우며 자칭 랟펨과 달리 행동 강령이 있거나 하지 않고 정체성이 다양하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남혐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페미니즘 운동이 성소수자 운동과 연대해야 한다고 여긴다. 정치적 올바름(PC)에 무게를 두는 모습이 보인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행동 패턴은 감정을 절제한 채 최대한 논리적으로 상대를 설득하고 싶어한다는 것. 

    3. 이들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여초커뮤, 일반인들) 여초커뮤 내 페미열풍에 마음이 동해, 가벼운 넷페미 용어들을 따라한다거나 이슈가 생겼을 때 몇 마디 거들지만 본인이 좋아하는 것들이 넷페미에게 공격받는 면이 있어서/완전히 동의하지 않아서/그냥 멋져보여서 반신반의하는 사람들. 


    이 정도이다. 몇날 며칠 모니터링하며 연구한다음 분류하면 더 체계적이겠지만 그 정도로 수고를 들이고 싶진 않아서, 그냥 지금까지 가졌던 생각을 정리했다. 


    나를 페미니스트로 규정할 당시 내가 저들 중 어떤 페미니스트였냐고 묻는다면 아마 2번 쪽이 아닐까 싶다. 근데 1번이든 2번이든 3번이든 기본적인 언어는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한남과 같은 말은 특히 요즘 일상생활하면서도 종종 듣기 때문에... 


    여하튼 나는 이제 저런 사고방식에 진절머리가 난다. 제일 짜증나는건, 래디컬들은 남혐에 동의하지 않으면 한남·흉자라고 고추 달아주기 바쁜 동시에, 리버럴들은 왜 래디컬들을 신경쓰냐며 걔네는 그냥 이상한 애들이니까 페미니즘을 오해하지 말라고 하는 것. '페미니즘은 성평등 사상인데 왜 꺼려해?'라고 물을 때 '워마드,랟펨 애들이 싫어'라고 하면 '걔네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야, 페미니즘을 오해하지 마'라고 답이 올 때가 있다. 근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왜 랟펨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는지가 나는 궁금하다. 그런 식의 페미니즘 운동은 안돼,라는 말을 랟펨 당사자들에게 해야지 왜 일반인들에게 오해하지 말라고 하는가? 버젓이 랟펨은 존재하고 리버럴을 쓰까페미라고, 'ㅇㅇ이 허락한 페미'라 규정하고 게이를 똥꼬충이라 칭하고 트랜스젠더를 '트랜스ㅇㅇ'으로 조롱하고 비하하는데 한 번도 제대로된 문제제기가 없었다. 여혐은 방관했으면서 남혐만 나무라냐, 라는 본인들의 주장과 랟펨은 방관하면서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기피하는 걸 나무라는 본인들의 행동을 다시 고찰해봤으면 좋겠다. 


    또 이들의 입장이 갈릴 때가 있는데, '미러링은 사실 진심이다'와 '미러링은 미러링에만 목적이 있지 거울을 깰 시간에 원본을 없애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 랟펨들은 미러링이 진심이라면서 적극적으로 (자칭)남성혐오를 표출하는데, 리버럴들은 진심도 아닌 미러링을 갖고 왜 페미니즘을 오해하냐고 묻고 있다. 제발 둘이 한 번 붙어서 입장정리를 했으면 좋겠다. 오해하지 말라고 무시하라고 해도, 버젓이 페미니즘을 말하면서 남혐하는 인간들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무시해야하는가? 


    서로 입장이 다른 점도 있지만 같은 점도 있다. 기본적으로 여성은 항상 피해자라고 여기는 것. 성차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 남성의 입장/타인의 입장에 대한 고려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것. 

    위와 같은 이야기에 대해 누군가는 '역차별 운운'하지 말라고 하더라. 하지만 난 역차별이란 말엔 동의하지 않는다. 여성이 항상 피해자이진 않다고 말하고 싶다.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이 항상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데 끌어오는 근거는 당연하겠지만 여성이 피해를 당했을 때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들이 '여성이라서' 피해를 받은 건지, 다른 이유 때문에 피해를 당했는데 그가 여성임을 주목한 건지는 제대로 고민하지 않는다는 거다. 하나 예를 들면, 넷페미들은 '성범죄 피해자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표기하지 말라'라며 피해자를 여성으로 밝힌 기사에 대해 여성혐오라고 손가락질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개에게 물려죽은 '사장'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표기하지 않자, '왜 여성의 피해를 숨기냐, 여성을 지우냐'라고 여성혐오를 주장한 적이 있다. 유아인의 '애호박으로 맞아봤니?'라는 트윗에도 그는 상대를 여성인지 남성인지 고려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얼렁뚱땅 여성혐오적 언행으로 뜨겁게 회자되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쯤에서 덧붙이자면 난 여성혐오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여성인권 증진을 위한 노력이 이 사회에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러링, 남성혐오, 근거없는 가해자 취급, 성차에 대한 부정과 특정 여성성을 죄악시하는 행위는 여권에 아무런 도움도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 


    후려치기 당했다, ㅇㅇ는 빻았다 와 같은 두루뭉실한 지적 표현이 위와 같은 현상을 설명할 때 주로 쓰이는 표현이다. 구체적으로 어떤게 문제라는 해설없이 '빻았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일은 그냥 빻은 일 되고, 여성혐오가 되어버린다. 이 마법의 단어를 피할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사실 우리나라 모든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까지도 다 빻았을지도 모른다. 일자눈썹도 빻은 것이고 테니스스커트도 빻은 것이며 페미니스트가 화장하는 것도 빻았고 그냥 꾸미는 것 자체도 빻았고 여성 아이돌이 노출하는 것도 빻았고 예쁘다는 칭찬도 꽃이라는 표현도 다 빻은 것이다. 마치 코딩처럼 넷페미들에게 입력되어 있는 것 같다.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해당 단어만 등장해도 반사적으로 '빻았네'를 외치는 모습. 빻은 것을 안 빻은 것으로, 안 빻은 것을 빻은 것으로 만들기 참 쉽다.


    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건,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것이다. 내 주변 어떤 친구(여)는 힘 쓰는 일에 대해 도와달라고 할 남자를 구해라,라고 조언한 윗 세대 사람에 대해 '빻았다'고 여기면서 진짜 그 일을 해야될 때에 남자를 필요한 적이 있었다. 힘이 드는 노동에 대한 것, 수학적 사고에 대한 것에 대해 여성의 일과 남성의 일을 나눌 필요는 절대 없다. 그건 현대사회가 상식의 선에서 이미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한 개인이 그 일을 하고 싶냐/아니냐의 문제는 완전히 다르다. 이 부분에 있어서 존재하는 성차를 인정해야 한다. 여자가 힘든 일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적지 않은 수의 여성은 힘든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아한다. 실제로 나도 그렇다. 아르바이트를 해야한다면 힘든 상하차나 일용직과 같은 일, 누군가를 보호하는 일은 피하고 싶고 내가 가진 기술을 활용하는 일을 하고 싶다. 물론 남자도 힘든 일이나 일용직을 평소에 굳이 자진해서 하고싶진 않을거다. 그러나 둘 다 급전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남자들은 본인의 몸이 수고를 좀 하더라도 비교적 적은 시간에 힘든 일을 하는 직업을 선택할 가능성이 여성보다 높다. 이건 누구도 강제할 수 없는 본인들의 선호도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이 선호도마저 태생이 아니라 사회가 그렇게 만든 것이니 성차를 믿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사회가 만들었든 아니든 그걸 떠나 어떤 집단이 갖고 있는 명백한 성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화장에 대해 '코르셋'이라 칭하는 걸까? 물론 현대사회에서 외모지상주의는 존재하고 그 압박이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크게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두에게 화장과 꾸밈을 앗아가버리면 남성과 여성은 정말 보다 평등하고 보다 행복해질까? 나는 남성과 여성이 각각 현대사회에서 요구받는 남성성의 목표, 여성성의 목표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보다 재력과 능력을 갖추는 것, 보다 예뻐지는 것이 각각의 성이 일반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인 것이다. 물론 현대에 이르러서는 둘이 많이 섞여있는 것 같다. 재력 뿐만 아니라 잘생기거나 예뻐지는 것도 필요하고, 예뻐지는 것 뿐만 아니라 능력도 갖추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그들이 각자 욕망하는 것이 다른데 그들의 '솔찍헌' 욕망까지 코르셋이라고 치부하는 게 오히려 더 코르셋(제약)같다. 기피해야할 것은 강요다. 화장하지 않는 여성 보고 화장하라고 압박하는 건 잘못됐다. 하지만 더 나은 피부와 더 잘생김/예쁨을 추구하는 본능적 욕망까지 제재할 수는 없다. 화장하라고 압박받는 것도 짜증나는데 화장하지 말라는 압박까지 받아야하는가? 그리고 솔직히 화장하고 싶은 여성에게 화장품을 빼앗는 게 여성인권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후퇴 아닌가?


    요즘의 이 넷페미들의 주장들을 보면 결과적으로 본인들이 욕하던 남성성을 추구하는 것 같다. '한남'처럼 머리나 외모를 신경쓰지 않고, '한남'처럼 저질스러운 단어들 쉽게 입에 올리고, '한남'처럼 행동하는 모든 것들. 본인이 편하고 만족한다면 그만두라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왜 굳이 "한남들이 싫어서" 한남이 되려하는거지. 흉내자지, 명예자지와 같은 말에 어울리는 건 오히려 그들 같다. 


    여하튼 요즘 참 페미니즘이 열풍이고 어린 친구들까지 페미니스트라고 본인 피알을 하며 즐거워하는 것 같다. 최근 블루오션을 쫓아 쏟아지는 각종 페미니즘 서적과 굿즈들을 하나씩 소지했다고 본인을 손쉽게 페미니스트라 선언할 만큼 여성주의가 그리 얕은 학문이던가. 여성주의, 페미니즘과 같은 운동은 다른 사상, 운동들과 똑같이 대중의 지지가 불가피하다. 페미니즘을 모르는 여성들, 그리고 남성의 지지 또한 얻을 수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남자가 허락한 페미니즘이라느니 흉자라느니 조롱하고 타인을 배척하는 한 이 사상과 운동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다. 


    솔직히 제자리에 머무르든 503이나 호주를 따라가든 내 알바는 아닌데, 가만히 있는 무고한 사람들까지 쳐 건드리니까 이렇게 내가 탈페미하고 페미혐오하게 된 거다. 약자라고 징징대면서 지들 맘에 안드는 것들 조롱하고 낙인찍고 악마화하고 없는 일을 만들어내고 부풀리고 이런 짓을 해대니 사람들이 동의할 수가 있나. 그래놓고 왜 페미니즘 안 하냐고? 지들 진영 내 질서정리부터 쳐 하고 오든가, 기성 페미니스트들은 메갈-워마드 언어 아무 비판없이 고대로 써대고 자정 작용도 안 되는데 서로 이게 페미니즘이다 저게 페미니즘이다 영업이나 하고 있고 지들이 그렇게 혐오하는 한남들을 닮아가는데 대체 어느 부분을 지지해야하는 건지. 그래서 '페미니즘이 아니라 성평등'이라는 말들이 나오는 거지. 나는 진절머리가 나도록 싫다. 더 이상 나를 페미니스트라 할 수 없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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