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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06. 19. "연애의 관습"
    일기/사유 2014. 6. 19. 17:12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먹고 먹히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소위 말하는 '기'로 상대와 나의 먹이사슬을 정리한 후 막대할지 막대해질지가 결정되는 것이라고. 어릴 때부터 내가 내린 분류 안에서 기가 약하고 찌질한 부류에 속했던 나는 그렇지 않은 아이들을 동경하며 '나도 기가 쎄졌으면 좋겠다'하고 염원하곤 했다. 행동 하나하나가 어색하지 않고 맵시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날라리 부류에 속하는 아이들과 대화할 때도 기죽지 않으려 나름 노력했다. 어찌 말하면 '허세'와 '뻔뻔함'을 기르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21년을 살아내고 보니 결국 기쎈 척하는 것이 몸에 배어버렸다. 누구와의 관계에서 내가 불리한 입장에 처하거나, 내가 더 감정 소모를 해야하거나, 한심해지게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같은 맥락으로 연애에 있어서도 '더 많이 좋아하는 쪽이 지는 것'이라는 문장을 모토로 삼아 나는 가치 있고 그럴 만한 사람이니까 '받는 쪽'의 입장을 취해야한다고 (스스로도 쪽팔리는 말이니 누군가에게 설명한 적은 없지만) 마음 속으로 결정내렸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훨씬 더 감정 소모해야하는 사랑, 바꿔 말하면 짝사랑을 바로 이번 년도 초까지만 해도 끈질기게 해오면서 그런 '한심한' 나를 탓하고 자존심 상해하는 짓을 반복했다. 

    [ 호감 → 좋아함 → 꼬시기 → 작은 떡밥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며 본격적 짝사랑 → 나도 떡밥을 던짐 → 꼬셔지지 않음 → 애매한 썸 때문에 힘듦 → 앓기 → 앓기 → 앓기 → 포기... ]

    이런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고 자책하고 다음엔 나를 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야지 다짐하면서도 또 짝사랑하게 되어버리는 것이 나였다. 그런데 지금 하고 있는 연애는, 과거의 경험으로 내 인생의 좌우명 노릇을 하고 있던 "다음에는 받는 사랑을 하자"라는 문장을 너무나 간단하게 당황시켜버렸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지금의 애인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분명 '받는 사랑'을 하고자 했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표현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억누르는 시도를 많이했다. 언제 한 번은 애인에게 '당신은 나를 너무 쉽게 무장해제시킨다'고 말했다. 왜 무장을 하느냐고 애인이 물었을 때 비로소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한 나만의 관습을 깨달았다. 

    "더 많이 좋아하는 쪽이 지는거야."

    "이러다 언제 버림 받을지 몰라" 

    "영원히 이렇게 안정된 상태일 거라고 생각하지 마" 

    이런 또 다른 내가 나에게 속삭이는 말들은 '이 사람은 분명 날 좋아하고 있는거야'라고 확신했다가 뒷통수를 맞았던 과거의 경험을 통한 반사적인 반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난 현재의 애인에게도 무장한 채로 다가가고 있었고 카톡 하나, 표현 하나 할 때마다 내가 너무 좋아하고 있는 게 아닌지, 좀 더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하는 것 아닌지 스스로를 검열하고 있었다. 참 멍청하고 버리고 싶은 관습이다. 하지만 이 감정을 드러낼 수도 없다. 역시나 같은 이유로 내가 너무 어리광부리는 것처럼 보일까봐. 

    지금도 여전히 덜 좋아하는 척 코스프레를 하면서 스트레스 받고 있고 애인의 감정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전제를 깐 채로 애정표현을 주고 받는다. 한심하고 애인으로써 실격이지만, 어쩔 수 없이 난 그런 사람이다. 이 관습을 버릴 수 있을까? 아니 절대로 버리지 못할 거다. 난 스스로를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연애에 있어선 다르다. 따지고 보면 이것이 진짜 첫 연애니까, 어떻게 하는 게 좋은 건지 갈피를 못 잡겠다. 그러니까,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지레 불안해하고 있는 거다. 그래서 어떠한 확신이 주어져도 이 관습을 버리는 건 갑자기 사족보행을 하라는 것과 난이도상으로 다를 바 없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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